2015년 11월 5일 목요일

민영환閔泳煥] 묘 - 대한제국시대의 충신

민영환(閔泳煥)의 묘소는 구성읍 마북리 구성초등학교 뒷편 산기슭에 있다. 본래 용인시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봉분없이 평장되었던 것을 1942년에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1959년 3월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신도비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필 제자(題字)와 그가 자결하였을 때 남긴 유서(遺書)도 함께 각자해 놓았다. 1972년 10월 묘역에 곡담 60m를 둘렀으며, 1974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후 1980년에 묘소 좌우에 계단석을 설치하였다.

그의 묘소에는 상석 1식을 비롯하여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1좌가 있다. 묘역을 크게 양분하여 계단으로 오르게 하고, 곡담을 높게 쌓은 것이 특이하다.
민영환(1861∼1905)은 조선 말기의 충신으로서 187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미국공사(美國公使)로 있다가, 1896년 3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불란서·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참정(參政)에 올랐다.
그는 서구문명에 밝았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變服)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제(日帝)의 침략이 심각해지자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분투하였으나, 독립당 (獨立黨)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大臣)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의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재임하던 1905년에 한일합방의 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이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公使)에 고(告)하는 유서(遺書)를 남기고 자진하였다. 훗날 그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숭록대부 의정대신 (崇祿大夫 議政大臣)에 추증하고, 고종황제의 묘정에 배향케 하였다. 아울러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술로는『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千一策)』등을 저술하였다.